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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교회는 세상 변화시키는 생명공동체이어야 합니다
 

중보자 지향의 삶을 살자. 그게 바로 고난의 도구입니다

「목 회와신학」이 창간 20주년을 맞이하여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신학교 교수, 목회자, 그리고 신학생들은 10년 뒤 한국 교회를 대표할 목회자로 사랑의교회를 담임하는 오정현 목사를 가장 많이 꼽았다. 오정현 목사가 생각하는 사랑의교회의 장점, 그리고 그가 제시하는 10년 뒤 한국 교회의 나아갈 방향성을 들어 보았다.



「목 회와신학」이 창간 20주년을 맞이하여 신학교 교수, 신학생, 목회자를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10년 뒤 한국교회를 대표할 목회자’로는 오정현 목사님을, ‘10년 뒤 한국교회를 대표할 교회’로는 사랑의교회라고 응답한 대답이 가장 많았습니다. 사랑의교회의 어떤 점이 평가받으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질문자체가 굉장한 부담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 부담자체가 저희에게 소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진 것이 소명이고 부담이 소명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차원에서 이번 평가가 저희 사랑의교회의 소명이 될 수 있겠죠. 사랑의교회는 옥한흠 목사님 때부터 지난 31년을 한결같이 말씀 사역 중심의 제자훈련에 집중했습니다. 말씀에 철저히 기초하는 교회는 유행을 타지 않습니다. 목회의 본질에 관해서는 유행이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제자훈련을 통해 시류를 넘어 묵묵하게 말씀에 기초한 사역을 흔들림 없이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사랑의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자 훈련은 그 자체가 목표는 아닙니다. 예수님을 닮아 가는 것이 목표입니다. 삶이 곧 목표입니다. 흔히 저희 교회가 원로 목사와 부임 목사의 사역 계승이 성공적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예수님 앞에서 제자도를 실천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쉽게 말하면 목회의 본질, 복음의 본질에 충실하고자 했다는 겁니다. 저희 교회의 시설은 현재 출석성도수에 비하면 너무도 열악합니다. 그러나 시설보다는 복음의 본질을 붙잡았습니다.

또 저희는 말씀사역에 근거한 제자훈련과 더불어서 저희 교회가 각 시기에 따른 사회적 책임이나 역할을 늘 감당하려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호스피스 사역을 교계에서 우리 교회가 가장 먼저 시작했습니다. 지난 18년간의 호스피스 사역에서 3천여명이 훈련을 받았고, 도움이 필요한 그늘진 곳에서 묵묵히 봉사하고 있습니다. 장애인 사역이나 캠퍼스 사역도 지속해 왔습니다. 그리고 제가 부임한 뒤 정감운동(정직과 감사 운동) 등을 펼쳤지요. 3년전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 굉장한 부담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한국교회와 사회를 돌아보면 ,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 저희 교회가 지속적으로 생각하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더욱이 한국교회가 복음적 윤리에서 약하다는 사실이 저를 깊이 고민하게 했습니다. 유교적 윤리에는 충실한데 복음적 윤리가 약합니다. 유교적 윤리의 영향이 크고 복음적 윤리가 바르게 형성이 안 되니 사회적으로 신뢰 회복이 안 됩니다. 이것을 한국 교회가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한국 사회는 압축 성장을 통해서 급성장을 했고, 잘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행복하지가 않아요. 지금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제자훈련을 통해서 소명 받은 자로서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을 추스르는 행복, 이것이 사랑의교회의 강점이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사랑의교회는 예장 합동 교단이지만 연합과 일치를 위해 많이 기도하고 애를 써왔습니다. 저희 교회가 한국목회자협의회나 교단장협의회를 위해 기도를 많이 하였고, 제가 부임한 뒤 부활절연합예배 준비 책임을 세 번이나 맡았으니까요. 한국 교회의 여러 가지 모난 부분과 상처를 서로 이해하는 입장에서 연합운동을 한 것이 저희 교회에도 축복이 되지 않았는가라고 생각합니다.


목사님의 말씀은 사랑의교회가 교회답다라는 표현과 이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님께서는 교회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초 대교회가 시작된 1세기부터 3세기, 혹은 4세기까지 소위 기독론에 대한 문제로 많은 논쟁이 있었지요. 그 과정에서 기독론(Christology)은 너무도 완벽하게 정리가 되었습니다. 지금 보아도 더 이상 손 델 것이 없을 정도지요. 또한 16세기 종교 개혁 시대의 핵심은 구원론이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구원론(Soteriology)에 관해서도 거의 손 델 것이 없을 정도로 정돈이 잘 되었습니다. 그런데 21세기를 맞이한 아직까지 교회론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자리가 잡히지 않았습니다.

목 회자들이 교회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자신의 목회 방향이 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교회가 사회적 책임을 다 해야 하고, 사회 불의를 참지 못 하는 것이라면 사회운동을 주로 해야지요. 또 구제가 교회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면 구제하는 일에 전력투구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어떻게 보느냐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저는 10년 후에도 같은 과제가 남겨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자 훈련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교회론에 입각한 본질에 충실한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해오는 거지요. 그렇다면 교회가 무엇입니까? 제가 볼 때 그 동안 한국 교회는 정적인 교회론인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은 자들의 모임’을 지나치게 강조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은 자들이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하여 보냄을 받은 소명자의 삶을 강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이것을 안 가르쳤습니다. 세상을 향해 보냄을 받은 소명자의 삶, 이것을 안 가르쳤기에 한국 교회에 이원론이 퍼졌습니다. 예배 할 때는 눈물을 흘렸다가 제직회 할 때는 싸우고, 철야기도 할 때는 은혜 받다가 당회 하면 완전 정치꾼이 되는 겁니다. 저희 교회의 21세기 버전으로 말하자면, 사랑의교회 소명은 ‘예수님의 온전한 제자 되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생명의 공동체’입니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교회 자체를 위해서는 훈련을 해야 하고, 세상 앞에서는 증거를 해야 하고, 하나님 앞에서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상을 향해 보냄을 받은 자의 삶’입니다. 이것을 분명하게 정리할 때 교회의 튼실한 뿌리가 됩니다. 오늘날 이러한 교회론이 확립되어 있지 않으니까 늘 뿌리가 없는 나무의 가지와 같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기만 하는 겁니다.

다들 조직신학적으로, 이론적으로는 교회에 대해 이해를 하는데 그것이 유기적으로 이해되지는 않습니다. 교회의 머리가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이 말이 유기적으로는 어떠한 뜻입니까? 교회가 열 명이 모이든, 천명이 모이든, 어느 지역에 있든, 어떤 교단에 속하든, 어떤 인종이 모이든 상관이 없이 크기를 막론하고 인종, 교단, 지역을 막론하고 교회의 머리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은 교회가 영광스럽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영광이 오늘 한국 교회에서 사라지고 있습니다. 교회의 영광을 회복해야 합니다. 저는 개척 교회의 목사 아들이었습니다. 저희 아버지가 목회하시는 개척 교회에서 얼마 안 떨어진 곳에 절이 있었습니다. 제가 어릴 때 그곳을 지나가면 예수쟁이 아들 지나간다고 돌멩이를 던지곤 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어요. 저희 아버지가 목회하시던 개척 교회가 크지는 않았지만 주눅 들지 않았고 그 교회를 함부로 폄하하거나 훼손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에는 교회의 영광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교회의 머리가 예수 그리스도라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교회의 간판을 붙였다면 그것은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교회는 함부로 훼손되거나 함부로 상처를 주고받거나 험담을 주고받을 대상이 아닙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주일 예배 마치고 집에 가서 교회에 대해 불평하고 지도자를 비난합니다. 개별적으로는 그런 비난거리가 있을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어떤 경우에도 예수님의 핏값으로 사신 교회와 그 교회의 영광을 손상시키는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한국 교회의 본질이 흔들거리는 거지요.


한국교회가 지금 말씀하신 교회가 되려면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먼 저 기본적으로 교회론의 뿌리를 튼실하게 재정립해야합니다. 다음으로 한국 교회 영성의 세계화입니다. 한국교회에는 선교적 영성, 800만 디아스포라의 국제적 영성, 그리고 북한의 순교적 영성이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살고 세계교회를 돕는 길은 이러한 영성을 세계화하는데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글로벌로 나아가야합니다. 이제는 로컬의 개념이 없어졌습니다 세계가 얼마나 정신없이 바뀌고 있습니까? 뉴욕타임즈의 하루분량이 중세 100년의 지식축적의 분량과 맞먹을 정도로 세계는 변화고 있습니다. 지역에 있지만 세계를 품는 비전이 교회에 있어야합니다. 감사한 것은 한국교회에는 글로벌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을 한국교회만의 독특한 영성에서 저는 그 힘을 보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전적인 위탁과 헌신의 영성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밤마다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소나무 밑에서 밤새 집중력을 가지고 기도하는 뜨거운 영성이 있습니다. 은혜 받은 사람들은 산꼭대기 올라가서 소나무 밑에서 밤 세워서 기도하였잖아요. 그 정도의 영감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한국 교회의 독특한 영성이잖아요. 그러한 영성의 국제화와 세계화,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책무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앞에 글로벌 플랫폼이 펼쳐져 있어요. 작금의 시대는 글로벌루션의 시대입니다. 글로벌루션은 글로벌(global)과 레볼루션(revolution)의 합성어입니다. 지금은 인터넷을 비롯한 IT의 영향으로 서울 강남에 있는 청소년들의 사고나, 상하이에 있는 청소년의 사고나, 싱가폴, 도쿄, 상파울로, 런던에 있는 청소년들의 생각이 다 똑같습니다. 글로벌루션의 시대입니다. 아프리카 오지에도 가보면 나이키 셔츠를 입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글로벌 플랫폼으로 나가지 않고 지금까지 해온 관성대로 사역하면 반드시 덫에 걸립니다. 그래서 이 덫에 걸리지 않기 위해 한국 교회가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이 사실 우리에게 큰 숙제이고, 제가 생각하는 대답은 한국 교회 영성의 세계화입니다.

21세기를 위해서는 한국 교회의 선교적 영성, 디아스포라의 국제적 영성, 그리고 북한의 순교적 영성을 종합해서 세계 선교를 마무리할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세계 선교를 마무리할 소명을 갖는다고 했을 때, 우리 머리 속에 섬광처럼 떠오르는 생각이 소위 동아시아 기독교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뉴욕 발 금융 위기는 단순한 금융 위기가 아니라 앵글로색슨 중심의 힘의 축이 동아시아로 옮겨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한국 교회, 중국 교회, 일본 교회가 거룩한 공동체를 이루어서 세계 선교를 마무리할 사명이 주어진 겁니다. 이를 위해서는 하나님이 열어가시는 그랜드 디자인을 보아야한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미래세계를 위해 한국교회가 승부수를 걸어야한다.

대한민국은 곧 자연 인구감소국가가 될 것입니다. 인구의 감소는 국가의 장래를 고민하는 교회에게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특별히 교회에 젊은이들의 비율이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차세대 신앙 교육은 한국교회 미래를 위해 결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대한민국에서는 어느 마을, 어느 지역이든지 교회가 제일 멋있었습니다. 그리고 교육 시스템도 교회가 제일 앞서갔지요. 구연동화니, 음악이니 모든 앞서가는 문화를 교회에서 접할 수 있었거든요.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교회 교육의 방법, 교회 교육의 인프라, 교회 교육의 공간이 가장 아름다웠고, 밝았고, 앞장섰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나라의 어디를 가든 교회가 어둠침침해요. 교회 교육의 방법도 낙후되었습니다. 저는 지금 너무도 가슴이 아픈 실상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사치가 아닌 한, 한국 교회는 재정의 절대량을 교육에 투입해야 합니다. 대학부를 위해서라면 대학교 앞에 학사라도 지어주어서 지방에서 온 학생들이 생활할 수 있도록 해주고, 중고등부 학생들을 위해서라면 예배 후에 교회에서 배움의 길을 열어주어야 합니다. 현실적으로 영어가 필수적이라면, 학생들에게 필요한 영어교육에 대해서도 교회가 앞장설 필요가 있습니다. 길은 찾아보면 상황에 맞게 열립니다. 영유아부를 위해서 가장 탁월한 운영 시스템을 만들어야죠. 신앙적인 인재 양성을 위해 교회의 재정을 아끼지 말고 투입해야 합니다. 다른 길이 없어요.



두 번째로, 차세대 신앙교육은 결국 가정과 관계가 있습니다. 가정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저는 미국에 살면서 미국의 복음주의적인 건강한 가정을 보았습니다. 미국의 건강한 복음주의 가정에는 자녀가 평균이 세명이상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이 가정의 회복인데, 가정 회복은 가치관의 문제와 연결이 되지요. 진실 된 인생의 보람, 허상이 아닌 인생의 진정한 열매, 참된 영적 성공이 어디 있는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곧 건강한 가정상이지요.

한국에서도 복음주의적 교회가 건강한 가정을 가르쳐야 합니다. 가정이 하나님의 언약인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결혼은 계약이 아니라 언약입니다. 계약은 상업적 용어지요. 그래서 환경, 조건, 그리고 여건이 바뀌면 파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약은 신앙적 용어입니다. 그래서 언약은 변경 할 수 없지요. 부부 사이에 언약이 들어가면 언약의 자손을 낳게 되어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구속사입니다. 건강한 가정에서 행복이 나옵니다. 아담이 완벽한 에덴동산에 있었지만 외로웠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지 않았습니다. 그 허전함을 채울 수 있는 돕는 배필은 딱 한사람입니다. 세상에 수많은 아름다운 여자가 있어도 그 남자의 외로움을 채울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명밖에 없습니다. 그 여자의 외로움을 채울 수 있는 남자도 딱 한 명밖에 없어요. 교회가 이 하나 되는 신비를 가르쳐야 합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가 신비하듯 결혼에도 신비가 있다는 사실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니 60세가 되고 70세가 되어도 날이 갈수록 신혼부부같이 살아가는 행복을 한국 교회가 가르쳐야 합니다.

세 번째로, 차세대 신앙교육을 위해 교회의 에너지가 모아져야합니다. 지금처럼 교회의 에너지가 서로간에 갈등과 싸움으로 소진되면 차세대교육을 위해 쓰여질 힘이 남아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교회가 내적인 갈등을 멈추고 복음적인 건강한 이미지로 쇄신되어야합니다. 전에는 기독교, 불교, 천주교 가운데 종교를 선택하라면 당연히 기독교가 1위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기독교가 3위입니다. 저는 지금 교회 개혁이 아니라 신뢰 회복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미지가 쇄신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에너지 누수를 막고 이미지 쇄신을 위해 절제해야 될 것은 절제함으로 세상에 비난의 빌미거리를 주지 않는 것도 중요지만, 교계적으로도 서로를 긍휼의 마음으로 살피고, 할 말 다하여 상처주는 일은 삼가야하니다.

안타 까운 것은 기독교를 정말 상처 내는 사람 중에 기독교인이라 자처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정말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의 에너지를 쌓는 창조적인 비판과 교회의 에너지를 고갈시키는 파괴적인 비난이 같을 수가 없습니다. 멀리 내다보지 못하고, 다음 세대를 생각하지 않고, 5년, 10년 뒤의 한국 교회를 생각하지 못하는 겁니다.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한국 교회를 생각하고 해야 합니다. 나의 말이 한국 교회에 에너지가 집중되는 말인가, 아니면 한국 교회 에너지에 누수가 되는 말인가를 생각해야지요. 거듭 말하지만, 차세대교육과 한국교회의 미래를 살리자면 먼저 교회의 에너지가 소모와 분열이 아니라 창조적인 힘으로 모아져야합니다.

「목회와신학」이 이번에 실시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10년 후 한국 교회가 힘써야 할 목회 분야로 사회적 봉사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섬김이라는 응답이 가장 많이 나왔습니다. 목사님은 한국교회봉사단 단장으로도 계신데, 한국교회의 사회봉사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한국교회는 이제 약자를 배려하고 보호하면서 사회적인 모순을 통합하는 모델이 되야합니다. 한국기독교가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고 사회통합의 엔진이 되야합니다. 이를 위해 더 이상 한국교회의 힘을 누수하면 안됩니다. 이제는 완전히 차원이 다르게 한국교회가 사회의 통합의 기저를 회복해야합니다. 이것이 보이지 않는 미래세계에 대해 승부를 거는 것입니다.

교회가 신뢰 회복을 위해서 어떤 봉사나 사회적 책임을 다 해야 한다는 것은 결과론적인 이야기죠. 예수님은 12명의 제자를 통해서 세계가 복음화 되는 비전을 보셨습니다. 그렇다면 사회적 책임과 시대를 가르치는 소명을 가진 목회자가 먼저 회복되고, 그 목회자와 함께 다듬어진 신실한 평신도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2000년도까지는 한국 교회가 무릎 꿇으면 민족 복음화, 일어서면 세계 선교를 외쳤습니다. 교단과 신학이 달라도 함께 선교로 통해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21세기로 접어들면서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그동안 쌓아진 갈등의 골이 더욱 깊어지고 서로를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이제는 신뢰 회복을 통해서 사회적 책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래서 2000년까지 선교로 하나 되었던 한국 교회가 이제는 봉사와 섬김으로 하나 되어야 합니다. 섬김과 봉사는 한국교회가 21세기에 신학적 다름과 교단적 차이를 극복하고 사회통합의 주역 될 수 있는 열쇠입니다.

만약 태안반도를 살리기 위해 교회가 나서지 않았다면 기독교의 마지막 마지노선이 무너지지 않았을까 싶어요. 태안 살리기에 우리가 정말 열심히 참여했거든요. 기독교 봉사자가 70만이라고 하니까요. 그리고 한국교회봉사단이 주최해서 간 사람만 30만이 넘었어요. 사랑의교회는 태안에서의 사태가 일어난 다음 날부터 마무리되는 그 날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봉사를 했습니다. 엄청난 투자를 했지요. 바로 그것이 ‘하나 되어 섬기고 섬기며 하나 되자’는 취지입니다. 교단과 신학의 차이를 극복하는 하나의 좋은 열매가 아니었겠습니까? 그런 차원에서 우리가 좀 더 집중력을 가지고 여러 가지 사항을 검토하면 좋지 않을까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사회의 갈등구조를 보라. 기존의 사회해체가 되는 과정이다. 한국교회가 새로운 모델을 제시해야한다. 이제 한국교회는 섬김과 봉사를 통하여 사회를 통합하는 비전과 책임을 져야합니다. 어떤 면에서 교회는 사회통합의 중추적 역할에서 국가이상의 중요한 위치에 서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를 통합시키는 아젠다를 선도적으로 내놓고, 거룩한 긴장과 미래를 위한 창조적 혼돈의 자리로 과감하게 나아가야합니다.



최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계기로 사회적인 갈등이 심화되는 조짐이 보이고 있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들인데 교회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사명에 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제 가 지난 주 성령 강령 주일을 맞이하면서 이런 설교를 했어요. 사도행전 13장 2절에 “주를 섬겨 금식 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3장 1절에는 안디옥 교회의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이름이 나오죠. 그들의 이름을 보면, 정통파 유대인 바울, 왕족 출신 마나엔, 안디옥 교회 창립 멤버 구레네 사람 루기오 등 각자의 배경이 완전히 다른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배경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갈라디아서 3잘 28절에서 고백한대로 성령이 함께 하시면 자유자나 노예나,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하나가 됩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행 13:2)라고 말씀하실 때, 금식이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죤’입니다. ‘죤’이라는 말은 자기를 괴롭힌다는 뜻이에요. 저는 다른 사람 이야기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비난하고 싶지 않아요. 그 사람을 제가 어떻게 다 압니까? 그 사람이 살아온 배경을 어떻게 다 알 수 있어요? 우리가 한 사람을 평가할 때 함부로 이야기하지 말고, 남들을 괴롭히지 말고, 자기를 좀 괴롭혔으면 합니다. 한국 교회가 다시 한번 자신을 돌아보면서 깊이 회개하고 좌와 우를 떠나서 다른 사람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성 경에 나타난 진리의 문제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동성애에 대한 신학적 바탕, 교회에서 여성의 역할, 이러한 문제는 여러 가지 논란이 있을 수 있지요. 그런데 이러한 복잡하고도 난해한 주제는 성경 전체의 10%도 안 됩니다. 우리가 신문을 해독할 능력만 있다면, 성경을 읽으면서 누구나 공감하는 하나님의 진리가 성경의 90%를 차지합니다. 그런데 왜 90%는 놓아두고 5%, 10%를 가지고 서로를 비난하고 싸웁니까? 저는 그게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남의 이야기 하기 전에 자기 자신을 괴롭히며 금식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만물을 다스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 뜻 가운데 사람을 세우시고 역사를 운행 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가져야 할 출발점입니다. 지도자를 선택하시고 세우시는 것은 최소한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불가능 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는 늘 어떤 상황과 시기에도 배울 것이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역사 속에 나타나는 그 어떤 공동체의 지도자도 공과가 모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일어난 현상을 보고 보수와 진보 모두, 이념에 사로잡힌 섯 부른 판단보다는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장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균형적인 감각을 가지고 오는 통전적 시각이 필요한 때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좀 더 조심스러워질 필요가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세상 역사는 다 지나가고 하나님 역사는 영원하다는 겁니다. 지금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문제를 놓고 교회가 이렇게 저렇게 나눠져서 왈가왈부 하는 것 자체가 너무 세속적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 나라는 영원합니다. “주의나라 주의 권세 영원히 아멘 아멘”이라고 매일 노래하면서도 그 진리가 우리의 마음에 와 닿지 않으니 문제입니다. 세속의 권력은 지나갑니다. 일시적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는 축복의 통로, 은총의 통로, 제사장의 나라 소명, 다음 세대의 회복, 글로벌 플랫폼에서의 사역, 동아시아 신앙 공동체 등 이러한 중요한 화두들은 변함이 없습니다. 교회가 화해와 일치의 주역이 되고 세상에 화평을 여는 길은 역사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전적으로 믿고 자신의 자리에서 축복의 통로, 은총의 통로요 제사장 나라의 소명자로서 섬김과 희생의 주도적 존재로서 사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를 향한 목사님의 뜨거운 마음이 전해지는 듯합니다. 마지막으로 10년 후를 대비하여 한국교회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말씀해주십시오.

이 제는 ‘듣는 복음’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보는 복음’이어야 합니다. 지난 부활주일 예배 설교에서 제가 ‘부활의 능력을 설명만 하지 말고 부활의 능력을 보여주고 체험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것을 붙잡아야 합니다. 한국 교회가 부활의 능력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통적 권위의식에 사로잡힌 계급장을 떼야 합니다. 과거에는 주어진 권위(given authority)에 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획득된 권위(earned authority)가 힘을 발휘하는 시대입니다. 제 아무리 기름 부음을 받은 종이라 할지라도 답답하고 지치고 피곤한 영혼을 기르는데 아무런 감동이 없다면 권위가 살아나지 않습니다. 반면에 평신도라도 참된 감동을 전하면 그 사람에게 권위가 주어집니다. 그런 점에서 듣는 복음에서 보는 복음으로 주어진 권위에서 획득된 권위의 시대로 변화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보는 복음을 위해서 어떻게 할 것입니까? 귀신을 쫓아내는 어떤 능력을 보여줄 것입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다시 고난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한국 교회에 고난이 없어졌습니다. 제가 교인들에게 강조하는 게 있습니다. 중산층 지향의 삶을 살지 말고 중보자 지향의 삶을 살자. 그게 바로 고난의 도구입니다. 저는 저희 부모님으로부터 고난을 이기는 신앙에 대해 배웠습니다.

고난의 십자가를 지는 신앙의 핵심은 목자의 심정입니다. 곧 예수님의 심정입니다. 목자의 심정이란 가난한데 자식이 많은 엄마의 심정입니다. 자식이 많습니다. 그런데 자식들에게 줄 게 없어요. 먹을 것이 없다고 엄마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머리카락이라도 잘라주고 싶고, 손톱이라도 빼주고 싶고, 막 쫓아다니면서 무엇이든 먹이고 싶은 겁니다. 그게 목자의 심정이지요. 한국 교회가 바로 그 목자의 심정을 회복해야 합니다.


일시 : 2009년 6월 3일
장소 : 사랑의교회 당회장실
진행 : 최원준 편집장
정리 : 이한진 기자
사진 : 이남수 부장
21세기 교회는 세상 변화시키는 생명공동체이어야 합니다
중보자 지향의 삶을 살자. 그게 바로 고난의 도구입니다

「목 회와신학」이 창간 20주년을 맞이하여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신학교 교수, 목회자, 그리고 신학생들은 10년 뒤 한국 교회를 대표할 목회자로 사랑의교회를 담임하는 오정현 목사를 가장 많이 꼽았다. 오정현 목사가 생각하는 사랑의교회의 장점, 그리고 그가 제시하는 10년 뒤 한국 교회의 나아갈 방향성을 들어 보았다.



「목 회와신학」이 창간 20주년을 맞이하여 신학교 교수, 신학생, 목회자를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10년 뒤 한국교회를 대표할 목회자’로는 오정현 목사님을, ‘10년 뒤 한국교회를 대표할 교회’로는 사랑의교회라고 응답한 대답이 가장 많았습니다. 사랑의교회의 어떤 점이 평가받으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질문자체가 굉장한 부담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 부담자체가 저희에게 소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진 것이 소명이고 부담이 소명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차원에서 이번 평가가 저희 사랑의교회의 소명이 될 수 있겠죠. 사랑의교회는 옥한흠 목사님 때부터 지난 31년을 한결같이 말씀 사역 중심의 제자훈련에 집중했습니다. 말씀에 철저히 기초하는 교회는 유행을 타지 않습니다. 목회의 본질에 관해서는 유행이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제자훈련을 통해 시류를 넘어 묵묵하게 말씀에 기초한 사역을 흔들림 없이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사랑의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자 훈련은 그 자체가 목표는 아닙니다. 예수님을 닮아 가는 것이 목표입니다. 삶이 곧 목표입니다. 흔히 저희 교회가 원로 목사와 부임 목사의 사역 계승이 성공적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예수님 앞에서 제자도를 실천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쉽게 말하면 목회의 본질, 복음의 본질에 충실하고자 했다는 겁니다. 저희 교회의 시설은 현재 출석성도수에 비하면 너무도 열악합니다. 그러나 시설보다는 복음의 본질을 붙잡았습니다.

또 저희는 말씀사역에 근거한 제자훈련과 더불어서 저희 교회가 각 시기에 따른 사회적 책임이나 역할을 늘 감당하려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호스피스 사역을 교계에서 우리 교회가 가장 먼저 시작했습니다. 지난 18년간의 호스피스 사역에서 3천여명이 훈련을 받았고, 도움이 필요한 그늘진 곳에서 묵묵히 봉사하고 있습니다. 장애인 사역이나 캠퍼스 사역도 지속해 왔습니다. 그리고 제가 부임한 뒤 정감운동(정직과 감사 운동) 등을 펼쳤지요. 3년전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 굉장한 부담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한국교회와 사회를 돌아보면 ,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 저희 교회가 지속적으로 생각하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더욱이 한국교회가 복음적 윤리에서 약하다는 사실이 저를 깊이 고민하게 했습니다. 유교적 윤리에는 충실한데 복음적 윤리가 약합니다. 유교적 윤리의 영향이 크고 복음적 윤리가 바르게 형성이 안 되니 사회적으로 신뢰 회복이 안 됩니다. 이것을 한국 교회가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한국 사회는 압축 성장을 통해서 급성장을 했고, 잘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행복하지가 않아요. 지금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제자훈련을 통해서 소명 받은 자로서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을 추스르는 행복, 이것이 사랑의교회의 강점이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사랑의교회는 예장 합동 교단이지만 연합과 일치를 위해 많이 기도하고 애를 써왔습니다. 저희 교회가 한국목회자협의회나 교단장협의회를 위해 기도를 많이 하였고, 제가 부임한 뒤 부활절연합예배 준비 책임을 세 번이나 맡았으니까요. 한국 교회의 여러 가지 모난 부분과 상처를 서로 이해하는 입장에서 연합운동을 한 것이 저희 교회에도 축복이 되지 않았는가라고 생각합니다.

목사님의 말씀은 사랑의교회가 교회답다라는 표현과 이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님께서는 교회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초 대교회가 시작된 1세기부터 3세기, 혹은 4세기까지 소위 기독론에 대한 문제로 많은 논쟁이 있었지요. 그 과정에서 기독론(Christology)은 너무도 완벽하게 정리가 되었습니다. 지금 보아도 더 이상 손 델 것이 없을 정도지요. 또한 16세기 종교 개혁 시대의 핵심은 구원론이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구원론(Soteriology)에 관해서도 거의 손 델 것이 없을 정도로 정돈이 잘 되었습니다. 그런데 21세기를 맞이한 아직까지 교회론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자리가 잡히지 않았습니다.

목 회자들이 교회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자신의 목회 방향이 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교회가 사회적 책임을 다 해야 하고, 사회 불의를 참지 못 하는 것이라면 사회운동을 주로 해야지요. 또 구제가 교회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면 구제하는 일에 전력투구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어떻게 보느냐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저는 10년 후에도 같은 과제가 남겨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자 훈련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교회론에 입각한 본질에 충실한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해오는 거지요. 그렇다면 교회가 무엇입니까? 제가 볼 때 그 동안 한국 교회는 정적인 교회론인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은 자들의 모임’을 지나치게 강조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은 자들이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하여 보냄을 받은 소명자의 삶을 강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이것을 안 가르쳤습니다. 세상을 향해 보냄을 받은 소명자의 삶, 이것을 안 가르쳤기에 한국 교회에 이원론이 퍼졌습니다. 예배 할 때는 눈물을 흘렸다가 제직회 할 때는 싸우고, 철야기도 할 때는 은혜 받다가 당회 하면 완전 정치꾼이 되는 겁니다. 저희 교회의 21세기 버전으로 말하자면, 사랑의교회 소명은 ‘예수님의 온전한 제자 되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생명의 공동체’입니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교회 자체를 위해서는 훈련을 해야 하고, 세상 앞에서는 증거를 해야 하고, 하나님 앞에서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상을 향해 보냄을 받은 자의 삶’입니다. 이것을 분명하게 정리할 때 교회의 튼실한 뿌리가 됩니다. 오늘날 이러한 교회론이 확립되어 있지 않으니까 늘 뿌리가 없는 나무의 가지와 같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기만 하는 겁니다.

다들 조직신학적으로, 이론적으로는 교회에 대해 이해를 하는데 그것이 유기적으로 이해되지는 않습니다. 교회의 머리가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이 말이 유기적으로는 어떠한 뜻입니까? 교회가 열 명이 모이든, 천명이 모이든, 어느 지역에 있든, 어떤 교단에 속하든, 어떤 인종이 모이든 상관이 없이 크기를 막론하고 인종, 교단, 지역을 막론하고 교회의 머리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은 교회가 영광스럽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영광이 오늘 한국 교회에서 사라지고 있습니다. 교회의 영광을 회복해야 합니다. 저는 개척 교회의 목사 아들이었습니다. 저희 아버지가 목회하시는 개척 교회에서 얼마 안 떨어진 곳에 절이 있었습니다. 제가 어릴 때 그곳을 지나가면 예수쟁이 아들 지나간다고 돌멩이를 던지곤 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어요. 저희 아버지가 목회하시던 개척 교회가 크지는 않았지만 주눅 들지 않았고 그 교회를 함부로 폄하하거나 훼손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에는 교회의 영광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교회의 머리가 예수 그리스도라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교회의 간판을 붙였다면 그것은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교회는 함부로 훼손되거나 함부로 상처를 주고받거나 험담을 주고받을 대상이 아닙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주일 예배 마치고 집에 가서 교회에 대해 불평하고 지도자를 비난합니다. 개별적으로는 그런 비난거리가 있을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어떤 경우에도 예수님의 핏값으로 사신 교회와 그 교회의 영광을 손상시키는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한국 교회의 본질이 흔들거리는 거지요.

한국교회가 지금 말씀하신 교회가 되려면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먼 저 기본적으로 교회론의 뿌리를 튼실하게 재정립해야합니다. 다음으로 한국 교회 영성의 세계화입니다. 한국교회에는 선교적 영성, 800만 디아스포라의 국제적 영성, 그리고 북한의 순교적 영성이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살고 세계교회를 돕는 길은 이러한 영성을 세계화하는데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글로벌로 나아가야합니다. 이제는 로컬의 개념이 없어졌습니다 세계가 얼마나 정신없이 바뀌고 있습니까? 뉴욕타임즈의 하루분량이 중세 100년의 지식축적의 분량과 맞먹을 정도로 세계는 변화고 있습니다. 지역에 있지만 세계를 품는 비전이 교회에 있어야합니다. 감사한 것은 한국교회에는 글로벌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을 한국교회만의 독특한 영성에서 저는 그 힘을 보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전적인 위탁과 헌신의 영성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밤마다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소나무 밑에서 밤새 집중력을 가지고 기도하는 뜨거운 영성이 있습니다. 은혜 받은 사람들은 산꼭대기 올라가서 소나무 밑에서 밤 세워서 기도하였잖아요. 그 정도의 영감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한국 교회의 독특한 영성이잖아요. 그러한 영성의 국제화와 세계화,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책무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앞에 글로벌 플랫폼이 펼쳐져 있어요. 작금의 시대는 글로벌루션의 시대입니다. 글로벌루션은 글로벌(global)과 레볼루션(revolution)의 합성어입니다. 지금은 인터넷을 비롯한 IT의 영향으로 서울 강남에 있는 청소년들의 사고나, 상하이에 있는 청소년의 사고나, 싱가폴, 도쿄, 상파울로, 런던에 있는 청소년들의 생각이 다 똑같습니다. 글로벌루션의 시대입니다. 아프리카 오지에도 가보면 나이키 셔츠를 입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글로벌 플랫폼으로 나가지 않고 지금까지 해온 관성대로 사역하면 반드시 덫에 걸립니다. 그래서 이 덫에 걸리지 않기 위해 한국 교회가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이 사실 우리에게 큰 숙제이고, 제가 생각하는 대답은 한국 교회 영성의 세계화입니다.

21세기를 위해서는 한국 교회의 선교적 영성, 디아스포라의 국제적 영성, 그리고 북한의 순교적 영성을 종합해서 세계 선교를 마무리할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세계 선교를 마무리할 소명을 갖는다고 했을 때, 우리 머리 속에 섬광처럼 떠오르는 생각이 소위 동아시아 기독교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뉴욕 발 금융 위기는 단순한 금융 위기가 아니라 앵글로색슨 중심의 힘의 축이 동아시아로 옮겨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한국 교회, 중국 교회, 일본 교회가 거룩한 공동체를 이루어서 세계 선교를 마무리할 사명이 주어진 겁니다. 이를 위해서는 하나님이 열어가시는 그랜드 디자인을 보아야한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미래세계를 위해 한국교회가 승부수를 걸어야한다.

대한민국은 곧 자연 인구감소국가가 될 것입니다. 인구의 감소는 국가의 장래를 고민하는 교회에게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특별히 교회에 젊은이들의 비율이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차세대 신앙 교육은 한국교회 미래를 위해 결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대한민국에서는 어느 마을, 어느 지역이든지 교회가 제일 멋있었습니다. 그리고 교육 시스템도 교회가 제일 앞서갔지요. 구연동화니, 음악이니 모든 앞서가는 문화를 교회에서 접할 수 있었거든요.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교회 교육의 방법, 교회 교육의 인프라, 교회 교육의 공간이 가장 아름다웠고, 밝았고, 앞장섰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나라의 어디를 가든 교회가 어둠침침해요. 교회 교육의 방법도 낙후되었습니다. 저는 지금 너무도 가슴이 아픈 실상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사치가 아닌 한, 한국 교회는 재정의 절대량을 교육에 투입해야 합니다. 대학부를 위해서라면 대학교 앞에 학사라도 지어주어서 지방에서 온 학생들이 생활할 수 있도록 해주고, 중고등부 학생들을 위해서라면 예배 후에 교회에서 배움의 길을 열어주어야 합니다. 현실적으로 영어가 필수적이라면, 학생들에게 필요한 영어교육에 대해서도 교회가 앞장설 필요가 있습니다. 길은 찾아보면 상황에 맞게 열립니다. 영유아부를 위해서 가장 탁월한 운영 시스템을 만들어야죠. 신앙적인 인재 양성을 위해 교회의 재정을 아끼지 말고 투입해야 합니다. 다른 길이 없어요.



두 번째로, 차세대 신앙교육은 결국 가정과 관계가 있습니다. 가정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저는 미국에 살면서 미국의 복음주의적인 건강한 가정을 보았습니다. 미국의 건강한 복음주의 가정에는 자녀가 평균이 세명이상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이 가정의 회복인데, 가정 회복은 가치관의 문제와 연결이 되지요. 진실 된 인생의 보람, 허상이 아닌 인생의 진정한 열매, 참된 영적 성공이 어디 있는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곧 건강한 가정상이지요.

한국에서도 복음주의적 교회가 건강한 가정을 가르쳐야 합니다. 가정이 하나님의 언약인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결혼은 계약이 아니라 언약입니다. 계약은 상업적 용어지요. 그래서 환경, 조건, 그리고 여건이 바뀌면 파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약은 신앙적 용어입니다. 그래서 언약은 변경 할 수 없지요. 부부 사이에 언약이 들어가면 언약의 자손을 낳게 되어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구속사입니다. 건강한 가정에서 행복이 나옵니다. 아담이 완벽한 에덴동산에 있었지만 외로웠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지 않았습니다. 그 허전함을 채울 수 있는 돕는 배필은 딱 한사람입니다. 세상에 수많은 아름다운 여자가 있어도 그 남자의 외로움을 채울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명밖에 없습니다. 그 여자의 외로움을 채울 수 있는 남자도 딱 한 명밖에 없어요. 교회가 이 하나 되는 신비를 가르쳐야 합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가 신비하듯 결혼에도 신비가 있다는 사실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니 60세가 되고 70세가 되어도 날이 갈수록 신혼부부같이 살아가는 행복을 한국 교회가 가르쳐야 합니다.

세 번째로, 차세대 신앙교육을 위해 교회의 에너지가 모아져야합니다. 지금처럼 교회의 에너지가 서로간에 갈등과 싸움으로 소진되면 차세대교육을 위해 쓰여질 힘이 남아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교회가 내적인 갈등을 멈추고 복음적인 건강한 이미지로 쇄신되어야합니다. 전에는 기독교, 불교, 천주교 가운데 종교를 선택하라면 당연히 기독교가 1위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기독교가 3위입니다. 저는 지금 교회 개혁이 아니라 신뢰 회복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미지가 쇄신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에너지 누수를 막고 이미지 쇄신을 위해 절제해야 될 것은 절제함으로 세상에 비난의 빌미거리를 주지 않는 것도 중요지만, 교계적으로도 서로를 긍휼의 마음으로 살피고, 할 말 다하여 상처주는 일은 삼가야하니다.

안타 까운 것은 기독교를 정말 상처 내는 사람 중에 기독교인이라 자처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정말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의 에너지를 쌓는 창조적인 비판과 교회의 에너지를 고갈시키는 파괴적인 비난이 같을 수가 없습니다. 멀리 내다보지 못하고, 다음 세대를 생각하지 않고, 5년, 10년 뒤의 한국 교회를 생각하지 못하는 겁니다.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한국 교회를 생각하고 해야 합니다. 나의 말이 한국 교회에 에너지가 집중되는 말인가, 아니면 한국 교회 에너지에 누수가 되는 말인가를 생각해야지요. 거듭 말하지만, 차세대교육과 한국교회의 미래를 살리자면 먼저 교회의 에너지가 소모와 분열이 아니라 창조적인 힘으로 모아져야합니다.

「목회와신학」이 이번에 실시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10년 후 한국 교회가 힘써야 할 목회 분야로 사회적 봉사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섬김이라는 응답이 가장 많이 나왔습니다. 목사님은 한국교회봉사단 단장으로도 계신데, 한국교회의 사회봉사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한국교회는 이제 약자를 배려하고 보호하면서 사회적인 모순을 통합하는 모델이 되야합니다. 한국기독교가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고 사회통합의 엔진이 되야합니다. 이를 위해 더 이상 한국교회의 힘을 누수하면 안됩니다. 이제는 완전히 차원이 다르게 한국교회가 사회의 통합의 기저를 회복해야합니다. 이것이 보이지 않는 미래세계에 대해 승부를 거는 것입니다.

교회가 신뢰 회복을 위해서 어떤 봉사나 사회적 책임을 다 해야 한다는 것은 결과론적인 이야기죠. 예수님은 12명의 제자를 통해서 세계가 복음화 되는 비전을 보셨습니다. 그렇다면 사회적 책임과 시대를 가르치는 소명을 가진 목회자가 먼저 회복되고, 그 목회자와 함께 다듬어진 신실한 평신도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2000년도까지는 한국 교회가 무릎 꿇으면 민족 복음화, 일어서면 세계 선교를 외쳤습니다. 교단과 신학이 달라도 함께 선교로 통해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21세기로 접어들면서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그동안 쌓아진 갈등의 골이 더욱 깊어지고 서로를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이제는 신뢰 회복을 통해서 사회적 책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래서 2000년까지 선교로 하나 되었던 한국 교회가 이제는 봉사와 섬김으로 하나 되어야 합니다. 섬김과 봉사는 한국교회가 21세기에 신학적 다름과 교단적 차이를 극복하고 사회통합의 주역 될 수 있는 열쇠입니다.

만약 태안반도를 살리기 위해 교회가 나서지 않았다면 기독교의 마지막 마지노선이 무너지지 않았을까 싶어요. 태안 살리기에 우리가 정말 열심히 참여했거든요. 기독교 봉사자가 70만이라고 하니까요. 그리고 한국교회봉사단이 주최해서 간 사람만 30만이 넘었어요. 사랑의교회는 태안에서의 사태가 일어난 다음 날부터 마무리되는 그 날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봉사를 했습니다. 엄청난 투자를 했지요. 바로 그것이 ‘하나 되어 섬기고 섬기며 하나 되자’는 취지입니다. 교단과 신학의 차이를 극복하는 하나의 좋은 열매가 아니었겠습니까? 그런 차원에서 우리가 좀 더 집중력을 가지고 여러 가지 사항을 검토하면 좋지 않을까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사회의 갈등구조를 보라. 기존의 사회해체가 되는 과정이다. 한국교회가 새로운 모델을 제시해야한다. 이제 한국교회는 섬김과 봉사를 통하여 사회를 통합하는 비전과 책임을 져야합니다. 어떤 면에서 교회는 사회통합의 중추적 역할에서 국가이상의 중요한 위치에 서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를 통합시키는 아젠다를 선도적으로 내놓고, 거룩한 긴장과 미래를 위한 창조적 혼돈의 자리로 과감하게 나아가야합니다.



최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계기로 사회적인 갈등이 심화되는 조짐이 보이고 있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들인데 교회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사명에 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제 가 지난 주 성령 강령 주일을 맞이하면서 이런 설교를 했어요. 사도행전 13장 2절에 “주를 섬겨 금식 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3장 1절에는 안디옥 교회의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이름이 나오죠. 그들의 이름을 보면, 정통파 유대인 바울, 왕족 출신 마나엔, 안디옥 교회 창립 멤버 구레네 사람 루기오 등 각자의 배경이 완전히 다른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배경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갈라디아서 3잘 28절에서 고백한대로 성령이 함께 하시면 자유자나 노예나,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하나가 됩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행 13:2)라고 말씀하실 때, 금식이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죤’입니다. ‘죤’이라는 말은 자기를 괴롭힌다는 뜻이에요.


저는 다른 사람 이야기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비난하고 싶지 않아요. 그 사람을 제가 어떻게 다 압니까? 그 사람이 살아온 배경을 어떻게 다 알 수 있어요? 우리가 한 사람을 평가할 때 함부로 이야기하지 말고, 남들을 괴롭히지 말고, 자기를 좀 괴롭혔으면 합니다.


한국 교회가 다시 한번 자신을 돌아보면서 깊이 회개하고 좌와 우를 떠나서 다른 사람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성 경에 나타난 진리의 문제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동성애에 대한 신학적 바탕, 교회에서 여성의 역할, 이러한 문제는 여러 가지 논란이 있을 수 있지요. 그런데 이러한 복잡하고도 난해한 주제는 성경 전체의 10%도 안 됩니다. 우리가 신문을 해독할 능력만 있다면, 성경을 읽으면서 누구나 공감하는 하나님의 진리가 성경의 90%를 차지합니다. 그런데 왜 90%는 놓아두고 5%, 10%를 가지고 서로를 비난하고 싸웁니까? 저는 그게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남의 이야기 하기 전에 자기 자신을 괴롭히며 금식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만물을 다스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 뜻 가운데 사람을 세우시고 역사를 운행 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가져야 할 출발점입니다. 지도자를 선택하시고 세우시는 것은 최소한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불가능 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는 늘 어떤 상황과 시기에도 배울 것이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역사 속에 나타나는 그 어떤 공동체의 지도자도 공과가 모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일어난 현상을 보고 보수와 진보 모두, 이념에 사로잡힌 섯 부른 판단보다는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장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균형적인 감각을 가지고 오는 통전적 시각이 필요한 때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좀 더 조심스러워질 필요가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세상 역사는 다 지나가고 하나님 역사는 영원하다는 겁니다. 지금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문제를 놓고 교회가 이렇게 저렇게 나눠져서 왈가왈부 하는 것 자체가 너무 세속적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 나라는 영원합니다. “주의나라 주의 권세 영원히 아멘 아멘”이라고 매일 노래하면서도 그 진리가 우리의 마음에 와 닿지 않으니 문제입니다. 세속의 권력은 지나갑니다. 일시적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는 축복의 통로, 은총의 통로, 제사장의 나라 소명, 다음 세대의 회복, 글로벌 플랫폼에서의 사역, 동아시아 신앙 공동체 등 이러한 중요한 화두들은 변함이 없습니다. 교회가 화해와 일치의 주역이 되고 세상에 화평을 여는 길은 역사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전적으로 믿고 자신의 자리에서 축복의 통로, 은총의 통로요 제사장 나라의 소명자로서 섬김과 희생의 주도적 존재로서 사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를 향한 목사님의 뜨거운 마음이 전해지는 듯합니다. 마지막으로 10년 후를 대비하여 한국교회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말씀해주십시오.

이 제는 ‘듣는 복음’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보는 복음’이어야 합니다. 지난 부활주일 예배 설교에서 제가 ‘부활의 능력을 설명만 하지 말고 부활의 능력을 보여주고 체험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것을 붙잡아야 합니다. 한국 교회가 부활의 능력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통적 권위의식에 사로잡힌 계급장을 떼야 합니다. 과거에는 주어진 권위(given authority)에 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획득된 권위(earned authority)가 힘을 발휘하는 시대입니다. 제 아무리 기름 부음을 받은 종이라 할지라도 답답하고 지치고 피곤한 영혼을 기르는데 아무런 감동이 없다면 권위가 살아나지 않습니다. 반면에 평신도라도 참된 감동을 전하면 그 사람에게 권위가 주어집니다. 그런 점에서 듣는 복음에서 보는 복음으로 주어진 권위에서 획득된 권위의 시대로 변화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보는 복음을 위해서 어떻게 할 것입니까? 귀신을 쫓아내는 어떤 능력을 보여줄 것입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다시 고난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한국 교회에 고난이 없어졌습니다. 제가 교인들에게 강조하는 게 있습니다. 중산층 지향의 삶을 살지 말고 중보자 지향의 삶을 살자. 그게 바로 고난의 도구입니다. 저는 저희 부모님으로부터 고난을 이기는 신앙에 대해 배웠습니다.

고난의 십자가를 지는 신앙의 핵심은 목자의 심정입니다. 곧 예수님의 심정입니다. 목자의 심정이란 가난한데 자식이 많은 엄마의 심정입니다. 자식이 많습니다. 그런데 자식들에게 줄 게 없어요. 먹을 것이 없다고 엄마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머리카락이라도 잘라주고 싶고, 손톱이라도 빼주고 싶고, 막 쫓아다니면서 무엇이든 먹이고 싶은 겁니다. 그게 목자의 심정이지요. 한국 교회가 바로 그 목자의 심정을 회복해야 합니다.

일시 : 2009년 6월 3일 장소 : 사랑의교회 당회장실 진행 : 최원준 편집장
정리 : 이한진 기자 사진 : 이남수 부장

목회와 신학/ 2009. 06.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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